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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왜 젊은 한의사는 만주로 떠났을까 : 독립군 군의관이 된 한의사

등록일
2021.08.29
조회수
4,087

[자생의료재단 × 국가보훈처] 독립 영웅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 우수상

왜 젊은 한의사는 만주로 떠났을까 - 독립군 군의관이 된 한의사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날 일제는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강제로 체결하고 공포하였으며 한국은 일제강점기 36년을 맞이하게 된다.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이듬해 1911년 30살의 한의사는 갑작스레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4000여평의 토지를 종손에게 전부 위탁한 채 홀연히 고향을 떠난 것이다.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그곳에서 김중건을 만난 그는 민족종교로르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큰 뜻에 감명받아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후에 김중건이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중국에서 강제 추방됐을 땐, 그의 자리를 대신해 독립군 대진단을 감독하고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다.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1915년, 그는 봉오동 전투의 주역 최운산 장군을 도와 독립군 부대 도독부에서 군의관 겸 참모 생활을 시작한다. 부상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무부대와 전쟁의 물자를 보급하는 부대를 맡아 진두지휘하였다. 산을 넘나들며 약초를 캐러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주며 대화하는 직업 특성상 주요 정보를 획득하고 연락책 역할을 하기에 적합했다.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1919년, 일제의 감시는 한층 더 심해진다. 그를 독립군의 숨겨진 자금책이자 조력자라 판단한 일본은 독립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친동생 신동균을 살해한다., 그러나 슬픔에 잠길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신흘(申屹), 신굴(申矻)'등 수시로 이름을 바꿔가며 활동을 이어 나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한평생 항일 투쟁의 길을 걸어온 그는 바로 한의사 신홍균 선생이었다.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신홍균 선생 - 이걸 좀 잡숴보시오 가을장마 끝에 숲곳에 돋는 검정버섯인데, 중국인들은 요리를 해 먹을 뿐 아니라 요기치풍도 하지요. 빗물에 씻어 소금에 범벅했으니 아마 요기가 좀 되리다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위기의 순간에 장병들을 구해낸 것은 군의관 신홍균의 기지였다. 1933년 6월, 한·중연합군은 일본군을 습격하기 위하여 대전자령 서쪽 계곡에 매복하였으나, 며칠째 내린 폭우로 배고픔과 추위에 빠졌따. 오랜기간 동안 염분을 섭취하지 못하여 몸이 붓고 힘이 없어 움직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 떄 신홍균이 숲속에서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뜯어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장병들에게 먹였다. 그의 기지로 극적인 재정비에 나선 연합군은 승기를 잡게 된다. 1933년 6월 30일 오후 1시경 독립군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대전자령 전투의 승전고가 울렸다.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이웃들에 대한 긍휼지심과 사랑으로 의료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한 한의사 신홍균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그의 마음은 군의를 넘어 국의의 마음이었다. |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

 

국가보훈처에 의하면 독립운동가는 2만여 명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에 등록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도 수십 만 명이라고 한다. 위대한 영웅 옆에는 언제나 위대한 동지가 있었으며, 뒤에서 도와주며 묵묵히 희생한 이들이 있었다. 한의사 신홍균과 같은 숨겨진 호국 영웅들의 헤아릴 수 없는 피와 눈물이 한반도 곳곳에 서려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생한방병원·자생의료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