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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의료재단은 국가유공자 보훈 사업을 통해 독립운동 정신 계승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사회공헌 국가유공자 보훈 사업 유족과의 만남

독립유공자 유족지원

모든 순간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았던 김산 독립유공자의 둘째 아들 김동열님

등록일
2019.11.25
조회수
3,082

자주독립정신을 가지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가겠습니다 


독립운동부터 국회의원, 목사까지 모든 날, 모든 순간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았던 김 산 독립유공자

 

함경북도 종성 출신인 김산 독립유공자는 선천읍 신성중학교 학생으로서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셨습니다. 당시 일대에서 시위 행진을 했던 군중은 1천 여 명 이상. 시위대열에 참여한 학생 김산은 이후 일경의 일제검속 때 체포되어 실형을 받고 투옥되셨습니다. 김산 선생은 출옥 후 중국으로 유학 길에 올라 금릉대학에서 공부하며 임시정부와 중국 간의 연결 다리로서 독립 운동을 이어가셨습니다. 이후 귀국하시어 1927년 마산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목사로 활동하시며 항일의식과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김산 선생의 나라를 위한 마음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국회의원으로서 정계에 몸을 담으셨는데, 고생과 역경은 끝이 없었습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친일파들이 깡패를 동원해 신체와 목숨을 위협하고 박해를 일삼았습니다. 해방은 됐지만 그 이후는 독재 투쟁의 시대였습니다.

 

3.1운동 주요 봉기도 (출처:독립기념관) / 3.1독립선언서(보성사판) (출처:독립기념관) 

 

아버지께서 강조하셨던 자주독립정신, 후대에서 그 유지를 이어갈 것입니다.

 

평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셨던 김산 독립유공자. 김산 선생의 둘째 아들 김동열님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정직하고 책임감이 강했던 분이라고 합니다. 목사로 사시며 항상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살 것, 비겁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책임을 지고 살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그렇게 청렴결백하게, 돈을 모르고 사셨던 아버지. 그래서 집안 생계가 윤택하지는 않았고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김동열님은' 젊은 시절 아들도 잘 돌보지 못하고 돈을 버는 데에만 매진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 효도하지 못해 죄송스럽고, 아버지 덕분에 훌륭하게 자란 아들이 기특하다고 말하는 김동열님.

 

"아버지께서 계속 강조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모든 개체들이 독립성을 잃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주체성을 잃고 미국이나 일본 등에 예속되어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지금까지도 잔재가 남아있는 부분이 있는데 국가나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자주독립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전부 독립 정신을 가지고, 남한테도 헌신하면서 살 수 있는 마음가짐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울 따름입니다."

 

자생의료재단 광화문자생한방병원 박원상 병원장 SAY

 

Q. 독립유공자 유족을 진료하신 소감은?

 

 

독립유공자 후손분들의 진료를 하면서 단순히 질병을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의 삶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독립유공자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다시 한번 느꼈고 자생의료재단에서 이 분들의 후손들께 좋은 치료를 무료로 해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쁘게 생각하고 한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진료하는 모습

 

자생의료재단 

김산 (1898~1984) / 운동계열 : 3.1운동 / 포상정보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 추서 / 공적개요 : - 1919년 3.1운동으로 징역6월형을 받고 1919.10.6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으나 그 후 계속된 활동으로 재체포되어 잔형을 집행받아 1920.12.1 출옥된바 있어 통산 1년6월형을 활동하였으며 수 차에 걸친 기독교 강연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한 사실이 확인됨 / 자생의료재단ㆍ자생한방병원은 독립유공자와 유족 의료 지원을 통해 독립운동 정신 계승에 앞장서고 있으며, 김산 독립유공자의 둘째 아들 김동열님의 건강은 광화문자생한방병원 박원상 병원장이 보살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