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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의료재단은 국가유공자 보훈 사업을 통해 독립운동 정신 계승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사회공헌 국가유공자 보훈 사업 유족과의 만남

독립유공자 유족지원

만주 독립군이 되고 싶었던 정의로운 16살 청년 전창호 선생의 아내 이순옥님

등록일
2019.11.13
조회수
3,513

무엇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진정한 독립이지 않을까요?

 

부산에서 나고 자란 독립운동가 전창호님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명석해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전창호님이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성적이 좋은 나머지 교장선생님이 한국인학교가 아닌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진학을 추천했을 정도라고 해요.

 

다른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일본인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전창호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일본인들로부터 심한 억압과 차별을 받는 것에 부당함을 느꼈고 점차 가슴에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이후 1943년 부산제일상업학교 재학 시절 그는 7명의 동지들과 독서회를 조직합니다. 외관상으론 공부를 위한 우등생들의 독서클럽이었지만, 실제로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학생들의 의견을 토론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듬해 독서회는 순국당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으로 확대됐고 전창호님은 서기로서 활동했지요.

 

부산 항일 학생의거 기념탑 (출처:부산역사문화대전)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의 이야기는 지금으로 치면 당시 조선 학생들의 BTS와 같았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대전자령 전투 등 독립군의 승리는 학생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는 지주였다고 해요. 삼천리 떨어진 부산에서조차 만주의 소식이 전해져 독립의 불씨를 당겼다는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순국당은 자신들도 힘을 모아 독립운동에 투신하자는 결론을 내렸고 1944년 8월 부산역에서 만나 만주로 가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부산역에서 그들을 기다린 건 일제경찰들의 포승줄이었습니다. 순국당의 활동을 알아챈 학부모가 경찰에 밀고를 해버린 탓입니다.

 

그렇게 전창호님과 동료 11명은 부산형무소에 투옥됐고 모진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12명 가운데 2명이 고문사하고 말았던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1945년 8월 광복까지 그는 1년여간 미결수로 옥고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부산형무소 (출처:부산역사문화대전)

 

전창호님은 16살 꽃다운 나이에 황금과 같은 시간을 일제에 뺏겼음에도 불구하고 “별거 아니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일이라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으셨겠지만, 당시 당했던 아픈 기억들이 잊혀지지 않으셨는지 시간이 지나서도 지난날을 또렷이 술회하셨다고 해요. 올곧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대쪽 같은 성격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변함 없으셨다고 하네요.

 

당시를 회상하시는 전창호님의 부인 이순옥님도 남편분과 같이 똑 부러지는 분이셨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전창호님의 독립운동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는데요. 그 당당함과 올곧음이 곧 전창호님과 이순옥님의 독립운동 정신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역사에 대한 공부를 엄청 많이 했어요. 국사를 되돌아보면 외국에 의해서 나라가 많이 힘들어했지요. 특히나 임진왜란 같은 경우 당시 까딱 잘못됐더라면 그때부터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됐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칩니다. 저도 10살 때 해방을 맞았는데요. 일제 때 차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웃나라들과 잘 지내는 것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진정한 독립이지 않을까요?”

 

“현섭이 아버지, 생전에 당신이 정의로움을 쫓아 고민하고 행동해준 덕분에 우리 가족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해하고 있어요. 부디 하늘나라에서 몸 건강히 계세요. 고맙습니다.”

 

자생의료재단 

친애하는 대통령 영부인님께 / 우리는 항일독립운동가 미망인들입니다. 늦었지만, 우리들 영부인 되신 것을 추하하고, 환영합니다. 평균 나이 80대 후빈인 우리 미망인들은 광복후 직업도 변변치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갖은 고생하며 자식들을 키욱(그 당시에는 많은 자식을 두었음)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대부분 미망인들), 행상도 하고, 바느질 품앗이도 하고 노동판에서 막노동도 했습니다. 이제 보상연금도 받아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지만, 극심한 노환에 시달리고 외롭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 지난 6월 9일 뉴스를 보니 영부인께서 장한 아내상, 장한 어머니상을 받는 분들과 청와대에서 함께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장한 어머니, 아내 자리는 못미치지만(생존한 미망인 몇 분은 장한 어머니, 아내 분도 있음) 살벌하고, 엄혹한 일제 강점기때 '삼대가 멸족' 한다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의 배우자들입니다. 우리 미망인들을 한번 청와대로 불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성사가 되면 우리 할머니들은 이 세상 하직할 때까지 아주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이 되고, 하루 하루 삶의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청와대에서 광복회원들을 초대하지만, 회원이 수 천명이다 보니 우리 미망인 할머니들은 한두 사람만 갈 수 있습니다. 우선 서울과 수도권에 거주하고 거동이 가능한 할머니분들이라도 한번 불러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꼭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요. / 유쾌한 김정숙 여사님! 반갑고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 2017년 6월 12일 / 독립유공자 미망인들 모임 대변인 이순옥 올림

 

지금도 이순옥님은 독립운동가들의 나라를 사랑했던 마음과 희생정신을 알리기 위해 대통령과 영부인을 만나 오찬을 가지셨을 정도로 부단히 노력하고 계십니다.

 

일산자생한방병원에서 3개월 간 추나요법, 침치료, 한약처방 등 한방통합치료를 받으셨으며 앞으로 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고 하십니다.

 

전차호님 안내 이순옥님과 일산자생한방병원 한종현 원장 모습

 

자생의료재단 

독립운동가 전창호 (1928~1993)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포상정보 : 1993년 건국포장 추서 / 공적개요 : 1943년부터 동지들과 함께 독서회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4년 5월 순국당을 조직하면서 서기에 임명. 독립군에 합류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피체되어 1945년 8월 출옥하기까지 1년간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 자생의료재단ㆍ자생한방병원은 독립유공자와 유족 의료 지원을 통해 독립운동 정신 계승에 앞장서고 있으며, 독립운동가 전창호님의 아내인 이순옥님의 건강은 일산자생한방병원 한종현 원장님이 보살피고 있습니다.